- [성경본문] 빌립보서3:6-14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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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0313㈜ 주일예배
본문 빌 3:3-14
제목 새로운 피조물의 삶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에게는 늘 유혹이 있습니다.
마라톤을
예를 들어보면 쉬울 것 같습니다.
42.195km라는 길을 달릴 때 어떤 유혹을 받을 까요?
부정의
유혹이 다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뛰지도
않고 뛴 것처럼 한다거나, 달린 시간을 속이는 것입니다.
마라톤에
그런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실제로 있습니다.
마라톤에는
마스터 마라톤이라는 게 있습니다.
마스터
마라톤이란 전문선수들이 아니라 아마추어 선수들이 튀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수가 100회 완주를 위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비난이 일었습니다. 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뛰지도 않고 자동차로 타고 가서 꼴인 지점 직전에 내리고는 거기서부터 달려 골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스터
코스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손목에다 칩을 달고 달립니다. 출발시간부터
골일 할 때까지 그 칩이 시간을 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칩을 잘 달리는 사람에게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칩을 다시 돌려 받아 마치 자기 기록처럼 제출하고 상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인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상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기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이 부정을 통해서라도 그런 행동을
하게 했고, 순수한 탐의 결정체인 마라톤의 세계를 더럽혔을까요? 그분들
나름대로 마라톤 세계에서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인정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 외에 가장 본질적인 유혹이 있다면 포기하고 싶은 유혹일 것입니다.
42.195Km 달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강인하게 준비 되지 않으면 달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남들이 다 앞서 나가고 자신 만 뒤에 처졌습니다. 게다가 체력은 고갈 되어 좇아갈 힘도 달릴 힘도 없습니다. 그럴 때 유혹이 밀려옵니다.
이번에는 포기해라, 다음에 잘 해서 달려라.
신앙의
길에도 많은 유혹이 뒤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대속, 즉 예수께서 대신 죄의 값을 치룬 것을, 예수 믿는 자들에게 적용하여 죄의 값을 다 치룬 것으로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를 덧입어 사는 것입니다. 또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성화의 길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혹과 시련과 고통과 절망이 다 올 때 그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시어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인도 하십니다.
이것을
견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택함과 사랑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인도로 인하여 완성에 이릅니다.
즉
이 땅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생을 마칩니다. 그런 후 주님 오실 때 부활로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뭔가
있는 듯 한 신을 찾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한국에 여기저기에 불쑥 불쑥 솟아나오는 이단과 사이비들 소리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이 다가 올 때 엉뚱한 소리에 넘어가거나, 혹은 좌절하여 신앙을 버립니다.
아니면
어느 정도 가정과 자년들이 또 사업이 안정 되었다 하면, 이정도면 됐지 하고 현실과 타협하려는
유혹이 다가옵니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는 이단도 이단이지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과 타협하는 타락의 유혹, 혹은 시련이 가장 크고 빈번한 유혹일 것입니다. 이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할 때 우리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체가 교회이기에 우리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으로 바뀔 때
교회는 자연 타락한 양태를 띄게 됩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종교로 주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점을 신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마태복음 23장 전체 걸쳐서 적나라하게 보게 됩니다. 그 중 일부를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23장 1-7절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지적을 들어보십시요.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 받지 말라 그들은 말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여기에서
서기관들이란 율법을 해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주력하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도록 다시 세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공회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층에 속하였고(마 16:21; 26:3, 57) 유대 사회에서 존경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눅 20:46).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쉼’(perushim)에서 나온 말을 붙여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 160년전 경부터 등장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평신도 운동을 전개하는 개혁세력 이었습니다. 유대정신과 율법이 헬라와 로마의
풍조에 의해 시들어 갈 때 이들은 관습을 중요시 여겼고, 철저히 율법을 지켰고,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공회, 즉 산헤드린 회원들이었기에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앞서 말씀 드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처음의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전통이나 장로들의 유전을 중요하게 여겨(마 15:2; 막 7:3, 5-8) 거의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철저하게 외적인 면을 중요시한 결과 안식일 준수에 얽매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거나(요
9:13, 16), 이삭을 잘라 먹는 것까지 (마 12:1; 눅 6:1-11) 죄로 간주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드린 대로
이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건하며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인정 받고 대접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높은 자리 앉기, 시장 입구에서
인사 받기, 경문을 크게 하여 차기, 선생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지만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하였기에 썩은 송장이 들어있으나 하얀 회 칠을
하여 깨끗하게 단장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 했습니다. 속은
더러우나 겉은 거룩한 척하는 위선자들이라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따르려
했던 자들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변한 것입니다. 진실한 신앙,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외의 신앙은 사라지고,
형식과 위선으로 분칠한 변색 되고 썩은
모습, 곧 종교인의 모습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으로 전락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의한 존경과 감사가 아니라,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도구로 전락 되었음을 말합니다. 사회학적으로는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 분류가 됩니다.
신을 찾고 구하고 섬기고 하는 차원에서
일반적인 분류를 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자녀들이 엄마 아빠 하고 좋아라 하고 안기고 찾습니다. 또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듣습니다. 왜요? 엄마 아빠가 좋으니까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점에서 신앙이라 표현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을 경외한다, 사랑한다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왜요?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그 은혜가 너무나 좋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을 뿐 아니라, 감사하여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에 좋아서 믿고 따르는 아이들이 갖는 그 마음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고 사랑하고 기쁘게 듣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 맺어가는 사랑의 고백이요 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타락한 종교적 혈통적 율법적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리겠노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위선과 형식적 종교인으로 만드는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주를 따르는 데는 도리어 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8-14절에
오직 예수 외에는 다른 것은 다 쓰레기라 말하며 자신은 오직 예수만을 알기를 원한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나는 아직 뭘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 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12절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로 정리가 됩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인해 예수께 잡히고 예수께서 시작하신 부르심과 구원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1절에선 ‘부활’ 13절에서는
‘앞에 있는 것’,
14절에서는 ‘푯대’,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다 한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구원과 부활로 완성되는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예수만을 더욱
알기를 원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길을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길은
예수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그 간절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경주하는 사람이 한 번 시작한 경주를
다 마친 자에게 줄 상을 바라보며 뒤를 보지 않고 앞을 향하여 달려 가는 것 같이 그렇게 달려 가고자 하는 대사도의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열망을 봅니다.
그가 12-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노라”
이 말씀들은 이런 뜻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기에 완성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믿기 이전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룬 업적들을 내려놓고 앞에 있는 구원의 완성이란 상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직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으로 구원이 완성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새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 자들에게 목표하신 놀라운 구원의 완성이라는 상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원이라는 경주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영광이나, 지금까지 성도로서 잘했다 할만한 업적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진정한 구원의 열매를 그것을 향햐여 달려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에 살기에
늘 고국을 그리워합니다. 부모와
우리가 자란 따뜻한 고향과 가족과 친구들이 거기에 있기에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국에 갈 때를 기다리고,
그러마 마침내 고국에 갈 비행기를 탈 때 가슴이 설레입니다. 비행기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 비행기를 타고 그리던 고국에 가서 그리던 이를 만나고 함께 놀라고 기뻐할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긴 시간을 마다 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리곤 공항에 안착을 하면 빨리 나가고 싶은 들뜬 마음에 일어서 가방을 챙깁니다. 그리곤 더디게
나오는 듯한 큰 백을 마침내 찾아서 검사를 받고 서둘러 출구를 나갑니다. 그리곤 기다렸던 보고싶었던 사랑하는
남편, 아내, 부모, 동생들을
만나 기뻐 뜁니다. 그리곤 다시 만난 기쁨으로 지나온 이야기들을 나누며 더 깊은 정과 사랑을 나눕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도착 했을 때, 스튜디어스가
그렇게 친절하고 예쁘다고, 혹은 기내식이 너무 맛있다고, 혹은 기내
면세품이 싸다고 하여 그것을 즐기며 비행기에 눌러 앉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들 일분이라도
빨리 내리려고 합니다. 어서 빨리 내려 비행기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참 사랑과 평안이 있는 집으로
가는 것이 백배 천 배 낫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비행기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은혜 베풀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기내식이나, 필요할 때 슈터디어스가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것들입니다.
혹 응급이 필요 할 때 도와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도착해서 누려야 할 땅에 이르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즉 이 땅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주어지는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주시려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요, 거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안과 기쁨과 만족입니다. 즉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
곧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로운 삶을 영원토록 누리는 것입니다.
20년 전 어떤 기자가 “나는 저녁 느즈막이 포장마차에 앉아 친구와인생을
노래하는 여기가 좋다”라며 천국보다 현세에 만족하겠다는 글을
썼습니다. 나름 의미 있는 글입니다만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 남아 기내식을 먹는 게 더 좋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죄 용서와 사랑과 인도하심의 은혜도 한량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하는 진정한 구원의 복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린 여전히 목적지에 이르지 않은 구원호라는 비행기를 타고 항행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리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고향의 향기를 맛보고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며 설레듯이, 우리는 구원의 완성, 곧 이 땅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려 끝까지 달려간 자들에게 주어질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 예수를 나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칭찬과 위로와 권능에
사로잡힌 영화의 삶을 영원히 누리는 구원의 목표를 상상하며 설렘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어떤 삶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까?
구원의 완성을
향한 남아 있는 경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대 사도인 바울 조차 무엇을 이루거나
얻을 것처럼 여기지 않고 달려갔듯이
우리도 주님이 부르는 그날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울의 말 처럼
옛 자랑과 지난 나의 업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타락하게 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것들을 내 던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안주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살피십시요. 그리고 그것에서 자유하고 버릴 수 있는 힘을 구하십시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 약속 해주셨습니다(요14:13). 믿고 기도의 길을 달려 가십시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즉 성령에 의지하여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전함으로
오는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날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앞서 신앙은 사랑의 고백이요 관계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교제하는 억지로가 아니라 사랑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군에 가 있는 한 청년이 고생 중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과 여학생으로부터 사랑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좋았는지
그 뒤로부터는 매일 그 여학생을 그려보는 것이 낙이 되었습니다. 보초를 설 때도 앞에 서있는 모든 나무가
그 학생으로 보입니다. 편지가 오는 날에는 자꾸 편지를 받는 시간만 기다려 집니다. 그리고 몰래 그 편지를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아니 수 없이 그 편지를
살며시 펴 보며 그 여학생의 깊은 마음을 또 느끼고 새기며 사랑의 마음을 더 깊이 더 높이 키워갑니다. 여학생도
그 친구가 보내는 편지를 받으며 읽고 또 읽으며 사랑을 쌓아가며 더욱 깊이 남자 친구를 알아갑니다. 믿음을
가집니다. 그리곤 마침내 자신의 인생을 맡길 결심을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뜨거운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고 교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에게 오셔서 나의 죄값을 짊어지고 죽으시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처럼”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고 깊은 사랑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새길 때 우리 안에 뜨거운 사랑의 불이 생깁니다. 내 일생을 다
주고 싶은 불이 생깁니다. 신앙이 사랑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이요,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달려가는 삶입니다. 매일 사랑의 편지를 읽으며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눈물과 유혹이기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그리고 내일도 달려가야 할 길입니다. 사랑의 편지를 읽으며 날마다 주님과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이루는 길을 달려가는 복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것과 현세의
안주하게 하는 것을 버리고,
날마다 사랑의
편지의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과 삶과 뜻을 헤아려 사는 길을 전심을 다하여 달려 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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