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0㈜ 주일예배
본문 눅 3:21-22
제목 공생애 시작 때 나타난 모습-겸손, 순종, 격려
교회력에 따르면 지금은 절기적으로 주현절에 해당합니다.
주현절은 영문으로는 그리스어 Epihaei 에서 유래된 Epiphany라고 부릅니다. 뜻은 예수께서 세상에 하나님으로서,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한문으로는 현현이란 단어를 씁니다.
이러한 절기의 근거는 예수께서 탄생 후,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한 일에서
찾습니다. 출생 후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함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또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을 위해 세례를 받으시고 비로소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 내신 사건에도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예수께서 진정한 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시기로는 예수님 탄생 후 1월 2일과 8일 사이 수요일을 주현절 날로 잡습니다. 그러니까 금년은 1월 6일 지난 주 수요일이 주현절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주현절이 지난 첫번 째 주일이라서, 주보 꼭대기 왼쪽에 보시면 현현 절 후 첫번째 주일이라고 썼고, 이어서 세례주일이라고 섰습니다.
현현절이면서 주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수께서 아기로 태어난 보다 공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주현절을 더 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절기 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 되고 성탄절의 의미가 강조 되다 보니 많이 약화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성탄절과 새해라는 시점과 맞물려 큰 의미 없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에는 주현절이라는 절기를 의식하고 넘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와보니 주현절의 의미를 인식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 뒤에 있는 광고판에서 보듯이 “Epiphany” “주현절”이라고 크게 써 붙여 놓고 기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는 세상의 빛,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드러내신 영광 받으실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주님이 빛과 주 하나님으로 드러내사, 우리의 빛과 하나님이 되신 주님을 기뻐하는 절기로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현절의 기원이 되는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첫 공생애 사건 속에 계시된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 더 깊이 이해 하고, 그런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시작 때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첫째 겸손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기 전 요한의 말을 한 번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눅 3:16-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 받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당시 사람들은 낙타가죽 옷을 입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벌꿀을 먹고 지내고, 선지자의 말을 하는 요한을 다들 높이 우러러 봤습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 중에는 이 요한을 그리스도아가 아닌가 생각 하는 사람들 조차 있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산속에 살고 수염을 기르고 긴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뜻도 알 없는 말을 하고 다니면 혹시 도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이 당시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남다른 삶을 살며 세상을 향해 선지자의 말을 하는 세례 요한을 보고 어찌 그런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대단한 위험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한이 정작 뭐라고 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 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올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주는 노예만도 못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고, 알곡과 쭉정이를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라고 말합니다.
메시야는 성령을 주시며 심판하실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메시야에 비교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메시야와 아예 비교 할 깜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신 메시야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 했을 때 세례 요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세례 요한의 모습이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3-1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내가 주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주께서 내게 세례를 받다니요?”
예수님을 보고 메시야 임을 안 세례 요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상하관계가 뚜렷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여기 오기 전 섬기던 교회 담임 목사님 어머니께서 거의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했던 담임목사님은 어느 날 저녁 어머니를 뵈러 아내와 함께 병실을 찾았습니다. 저는 담임 목사를 보좌하고 있던 터라 모시고 가야 했기에 함께 병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담임목사님께서 어머님과 예배를 드리자 하시며 저보고 그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하여 느닷없이 예배를 인도하며 말씀을 전하며 담임목사님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무척 당황했습니다. 예상치도 못했거니와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의식이 없으신 어머니를 위해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공식예배에서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예배를 인도하며 말씀을 선포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담임목사님께서도 참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함께 예배 드리는 자리이기에 당연하게 생각해서 어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비공식적 자리에서 담임목사님께서 제게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을 때 무척 당황이 되셨던 것입니다. 제가 들으면 들었지 전해야 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런 심정 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상대는 메시야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 드려 사람들이 공경하고 존경하다 못해 혹 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여겼던 그 세례요한 조차도 실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노예가 되는 것 만 해도 벅찬 만큼 높고 위대한 분이, 곧 성령을 주시고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 앞에 자기를 낮추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세례 요한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죄가 없으시지만 자신도 죄 있는 우리들 같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을 죄인과 같이 자신을 동질화 하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이렇게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무궁한 긍휼의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해 자신을 이렇게 낮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낮추심의 절정은 나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라는 불명예와 치욕을 받으며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무궁한 사랑, 자격 없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무궁한 큰 긍휼이 었습니다.
이 무궁한 큰 긍휼로 흠 많은 우리를 오늘도 불렀고, 용서하셨고, 새 날을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덧입고 있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다 주며 품어주시는 주님이 바로 오신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할렐루야!
본문에서 나타내시는 또 다른 주님의 모습은 순종의 모습입니다. 앞서 드린 내용과 동일한 장면 즉 겸손히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실 때 놀라는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며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이 말씀은 세례를 통해 자신을 인간과 동질화 하여 장차 죄인으로서 십자가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공생애를 시작하고, 장차 자신을 믿는 자들이 세례를 통하여 예수와 같이 될 것임을 예표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와 같이 되었듯이,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를 통해 예수와 같이 의롭게 됨을 말합니다. 세례는 씻음과 동시에 예수와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요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무궁한 사랑에서,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순종하여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기쁘게 성부님의 뜻에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공생애를 살기 전 많은 시간 기도를 하셨고 성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끊임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 하나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 길이 자신을 한 없이 낮추어야 하는 길일지라도 기쁘게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목숨을 십자가에 놓아야 할 때, 인간적인 고통이 괴롭게 할 때, 그 때에도 성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려 놓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 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성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고 맡겼습니다. 뜻을 분별하여 그 뜻에 자신을 내려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셨습니다.
어찌 주님의 주시는 멍에가 가볍겠고 쉽겠습니까? 어찌 주께서 지실 십자가 쉬웠겠습니까? 그 토록 힘들고 어려웠기에 주 예수께서도 그토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쏟듯이 밤 새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자신의 멍에는 쉽다고 합니다. 그러니 와서 멍에를 메고, 또 배우라 하십니다. 왜요?
막상 따르기 어렵고 지기 어렵게 여겨지는 십자가라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여 지기로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멸시와 고통이 있었지만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의 부활의 생명과 승리, 우리의 생명과 영생을 낳은 것이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수치를 기꺼이 받으며 순종하는 주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이 이웃을 사랑함에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내 자아와 하나님 뜻 사이에 서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 주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이 되었다면 볼 것 없이 주의 뜻에 나를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과 쉼이 있습니다.
불안과 근심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의 뜻을 붙잡는데 있고,
평안과 쉼은 주님을 신뢰하고 따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순종함으로 자기 인생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와 하나님이시요 모든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과 깊이 교제 하십시요. 그리고 그 뜻을 분별하여 믿고 순종하십시요.
그 길에 평안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의 길이 있습니다.
세례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모습은 격려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합니다. 또 성부께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과 성부 하나님께서 동시에 성자 예수께 임하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자 예수를 성령과 성부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상호간의 사랑을 봅니다. 한 분 하나님이면서도 각각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사역하며 함께 사랑으로 협력하는 무궁한 사랑의 교제, 코이노니아를 봅니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을 사랑하여 순종하고, 성령과 성령은 성자를 사랑하여 보내시되 함께 격려하여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사랑의 교제를 완벽하게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상호간의 사랑의 교제를 통한 격려를 보여줍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과 혹은 아내와 남편과 자녀들의 관계가 어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관계가 어떻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사랑의 교제를 통한 격려와 협력과 순종과 섬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항상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처지에서 이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주고 사랑의 격려와 교제와 섬김과 순종의 길을 가신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낮아짐과 순종과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통한 무한한 사랑의 협력과 격려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길을 사랑으로 걸어가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과 삼위 하나님을 우리는 우리 주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주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정말 중요하게 얘기 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가신 주님을 성부와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인을 치신 것입니다.
바로 성부와 성령 하나님께 인정하시고 정하신 그 메시야가 바로 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예수야 말고 믿고 따라야 할 바로 그 메시야 구원의 주이니 그대로 그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사람 앞에서 낮아지고 순종하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따르는 길에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성부와 성령이 보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세상의 조롱을 넘어 주를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길이라고
유일하신 하나님 주 예수께서 그 삶과 승리로 보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이라면
낮아지고 순종하고 사랑으로 격려하는 협력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예수를 닮아가는 자의 진정한 승리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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