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 예배와 말씀 >
  • 금주의 말씀
신학적 회의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눅7:18-23)
함태주 2016-01-31 추천 0 댓글 0 조회 365

20160131㈜ 주일예배

본문 눅 7 18-23

제목 신학적 회의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

 

얼마 전 지수와 집에서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연세가 저보다 훨씬 많으신 분인데도 청년보다 나은 단단한 근육질 몸과 건강을 유지하는 분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수가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하고 감탄 할 때 마다

제가 한 마디씩 했습니다. 나도 왕년에 저랬어

나중에 다 보고 나서 이런 저러 얘기를 할 때 였습니다.

아빠, 옛날에 산에 가고 얼음 폭포 올라갔다는 것 다 거짓말이지?

영상을 볼 때 나도 옛날에 저랬어?라는 말을 농담과 거짓말로 들었던 터에 저의 과거 마저 거짓말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제가 속해 있던 산악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진들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도 잘 안 믿었습니다.

그 홈페이지에 올려진 사진에는 제 얼굴이 여간 해서 안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봐도 거의 없다고 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산악회 찍사 였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 때 당시 카메라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지수가 저의 과거를 믿겠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이 이와 비슷 합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것 같아도 어느 순간 믿음이 흔들려 갈팡질팡 할 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경외하고 예배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예수 만이 모든 영혼의 주와 하나님이심 확신 있게 전하지 못합니다.

마치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의심 반 두려움 반으로 지나는 것 같습니다.

그 영적 어둠의 터널을 다 빠져 나오기까지는 그 길은 계속 됩니다.

 

더군다나 이 뉴질랜드 같이 천국 비슷한 곳에 살게 될 때 더욱 그런 회의가 밀려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뉴질랜드인들이 예수를 잘 믿는 다고 하는 한국인들보다 더 예의 바르고, 더 진실하고, 더 친절하고, 더 잘사는 모습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뉴질랜드가 살기는 좋아도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는 무덤과 같은 곳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신앙이란 이러한 세상에서 정말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와는 처지가 다르지만 신앙적 회의에 빠진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그 유명한 세례 요한 입니다. 예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선지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주며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던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예수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할 정도로, 예수께서 메시야 임을 알았고 세례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까? 옥에 갇혀 깊은 회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놀라운 일이요 깜짝 놀랄 일이 아닙니까? 세례 요한은 가장 먼저 예수가 메시야 임을 알 보았고, 세례까지 주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했을 만큼, 구원이 예수께 있음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를 의심하는 신학적 회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세례 요한이 회의에 빠졌다니!

 

세례 요한은 왜 이런 신학적 회의에 빠졌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가 기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여 우리는 그런 상황을 유추 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우선 세례 요한은 매우 초라한 처지에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갇히게 된 이유는 당시 유대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던 분봉 왕 헤롯의 악행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 챈 것을 옳지 못하다 비판했던 것입니다. 민주 사회가 아니었던 당시에 왕을 비판 했으니 무사 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비판 전 이런 처분을 감수 하려는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 황제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부도덕한 짖을 자행하는 자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현실이 그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신 메시야와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 세계와의 괴리감에 깊은 회의를 격어야 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일찍이 선포하기를 메시야가 오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고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정결하게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선포 했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뿐 아니라, 이 세상을 뒤집어 엎어 알곡은 모으고 쭉정이, 곧 부도덕하고 부당하고 외세의 세력과 죄인들을 거두어 불태워 소멸하고 새 세상이 오게 할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메시야가 왔다 하나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로 인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옥에 갇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메시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신이 예언 했고, 세례를 주었고, 영생과 죽음과 심판의 주로 와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바꾸어 줄 것을 기대했던 그 메시야와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메시야에 대한 시각을 주관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혁명적 사고와 이상을 해결해 주실 분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예수에게 나타나지 않자 실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회의에 빠졌습니다.

아니 저런 사람이 진짜 오시마 했던 그 메시야인가?  

혹시 내가 잘 못 본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이러한 증세가 끊임없이 우리 안에 요동칩니다.

내가 알고 기대했던 모습으로 예수께서 다가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교회 전체가 큰 신학적 회의에 빠졌던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세월호 사건입니다. 수 백명의 어린 청소년들이 눈 앞에서 죽어 갔습니다. 모든 국민이 염원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침수 이후 어느 누구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그 기도에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집사님의 딸, 아들, 권사님의 딸 아들, 장로님의 딸, 아들, 목사님의 딸 아들이라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믿는 그 잘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 거냐 하고 조롱 했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에게서와 같이 깊은 회의가 교회와 신앙을 강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참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부모님들의 기대와 꿈이었던 딸들이요, 아들들이 까닭 모른 채 죽어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 있는가?

 

가슴과 심장이 터지도록 부르짖고 부르짖는 그 처절한 몸부림의 기도와 가장 아프고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간구해야만 했던 현실과 예수 믿음으로 복 받고 형통한다는 믿음 사이에 서서 고뇌해야 했던 것입니다.

항상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던 가르침과 현실의 그렇지 못한 처지 한 가운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이 자꾸 꼬일 때가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는데 긴 시간 동안 아무 진척도 없는 고달픈 현실이 계속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회의감이 찾아듭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 , 속 시원하게 응답하지 않으실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계시는가? 내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예수는 없다 신은 없다 말하며 회의적 생각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에도 확신이 없어지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예수의 놀라운 은혜를 전한다는 것은 아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의 하는 자들을 대표하듯이 질문을 던진 질문에 예수님은 뭐라 답을 하셨습니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들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한 마디를 더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은 당시 여러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서 있는 11-17절에서는 나인성의 독자를 잃은 한 미망인의 슬픔과 절망을 기쁨으로 새롭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은 독자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은 할 수 없는, 즉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바로 그 메시야 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경에 오시마 한 그 구원자자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기대했던 혁명적 예수의 모습은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면 하실 수 없는 그 일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기준에 맞추어 메시야를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과 철학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23절 말씀에서와 같이 다 실족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을 겪게 될 것입니다.

 

자기 식대로 예수를 바라보다가 실족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요, 장로들이요, 서기관들이요, 사두개인들 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갈리리 시골 사람이요, 목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라 할 때 콧 방귀를 꼈습니다. 여러 이적을 행하며, 특히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주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서도 메시야 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믿어 왔던 그 동안의 체계를 버리고 예수를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성을 모독 한다는 죄를 씌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아 죽였습니다. 메시야를 못 밖아 죽인 것입니다.

 

자신의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를 인하여 걸려 넘어졌습니다. 큰 죄에 빠진 것입니다. 구원의 주 예수를 멸시하고, 이 예수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사울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자가 메시야 일리가 없다는 자신의 편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핍박하는 죄인 중의 죄인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께서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가졌던 편견이 산산조각 나고 십자가의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메시야 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3년간의 깊은 묵상과 훈련을 통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더 깊이 깨달은 후에 자신의 전 삼을 주 예수를 위해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자기 편견을 버리고 예수는 세상의 모든 인생들의 죄와 고통과 죽음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는 복이 있다는 언약입니다. 어떤 복에 대한 언약입니까?

맹인이 보며, 걷지 못하는 자가 걸으며, 나병으로 죽어가는 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복이 임한다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을 육체적 문제를 않고 씨름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풀어주기 위해 오신 것으로만 이해 해서는 안됩니다. 왜요? 예수님은 이들을 고쳐 주심을 통해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야가 오게 되면 있게 될 것이라 했던 일을 행함으로 자신이 메시야 임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서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포함하여, 영적으로 소경 되고, 길을 잃고, 죄로 죽어가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해 치닫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오신 분이심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우리가 몰랐을 때 성부와 함께 온 우주를 창조하셨던 놀라운 권능의 하나님이셨던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저주 받을 죄를 지어 죽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창조자 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죄의 문제요, 이 문제가 해결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인생과 행복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하고 변함없는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불충분하며 유한하기에 마실 때만 시원하게 하는 음료수와 같을 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영원한 삶이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분명히 알고 계셨기에 죄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나라에 다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사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는 길을 막고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인생의 고통과 죄악에서 자유케 할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삶을 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임 당했으나 부활하사, 자신이 참으로 인간을 죄에서 자유케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 밖에 하실 수 없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께 보냄 받은 구세주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인생의 눈물과 고통,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하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섯 번 째 남자와 사는 불쌍한 수가성 여인에게 이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고자 찾는 자들에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며 당신이 세상을 위한 생명이 떡이라 하셨습니다.

 

간음하여 들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조차 정죄하지 않고 새 삶을 주시고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며 자신이 이 어둔 세상의 영혼들에게 생명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이 땅의 고통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자유케 하심으로 참 인생과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시는 생명의 물이요, 떡이요, 빛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하지 않고, 즉 자기 편견 때문에 무지함으로 예수를 제한 하거나 버리지 않고, 예수님이 인생의 고통과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하실 나의 하나님, 모든 영혼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회개하고 따를 때 어떻게 됩니까? 이 땅의 눈물과 아픔과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참 사랑 안에서 가야 할 참 인생의 길을 가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어제 중국에서 매몰 되었던 광부가 36일 만에 구조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구조 되어 나올 때 박수와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고 합니다. 죽었던 생명이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그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고 구조 될 때까지 계속해서 먹을 것을 공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서 구조 된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떡이요 빛이신 예수 안에 거할 때, 매몰 된 세상 같은 이 땅에서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주님이 함께 하사 우리 인생의 고통과 눈물과 죄와 죽음을 이기도록 신령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와 생명을 누리게 하실 완전한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누구든지 말로 말미암아 실족지 안는 자는 복이 있도다 언약 하셨습니다. 내 뜻과 생각과 다른 것 같아도 주 예수를 끝까지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이 언약이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요, 은혜로 영원한 나라를 누리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즉 생명의 물이요, 떡이요, 빛이신 예수가 나의 주, 하나님이심을 신뢰하고 더욱 찾고 기다리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외면 받으시는 예수(눅 4: 22-30) 함태주 2016.02.08 0 281
다음글 나를 바꾸실 내 주 하나님 함태주 2016.01.22 0 392

Cnr Te Aroha St. & River Rd., Hamilton, New Zealand TEL : 07-855-0020 지도보기

Copyright © 해밀턴한인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0
  • Total88,769
  • rss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