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07㈜ 주일예배
본문 눅 4:22-30
제목 외면 받으시는 예수-구원은 누구에게
더운 여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성도님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남 섬을 잘 다녀 왔습니다.
처음 가보는 남 섬이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세미나 장소는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한 30분 떨어진 시골이었습니다.
공기도 맑고 하늘도 푸른 모습이 꼭 해밀턴 같았습니다.
외지에 있다 보니 핸드폰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신호가 희미하게 잡혀서 방향을 잘 맞추어야 했고, 소리도 잡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와 떨어진 크리스찬 캠프여서 조용했고 기도하며 지내기에
딱 좋았습니다.
60명 이상의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강사님들은 다섯 분이었고, 그 중 한 목사님은 독일에서 한인교회를 담당하시는 분인데 24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이번 세미나는 여느 세미나와 같이 교회성장에 관한 얘기는 전무했습니다. 대신 “No turning Back”이란 주제에 맞게 목회자의 사명을 다시 고취시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강사들은 목회자의 바른 리더십, 초대교회 정신의 회복, 기독교적 가치의 삶을 살아내는 윤리목회, 예수께 뿌린 내린 깊은 영성, 디아스포라, 즉 해외한인교회의 사명과 영광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고, 참여 자들은 깊은 깨달음과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의가 끝나면 강사로 참여한 강사들과 지역별로 나눈 목사님들 그룹이 모여 질문과 응답하는 시간들을 강의마다 가졌습니다.
사모들도 같이 들었고, 강의 후에는 사모들도 강사들과 함께 이민 목회의 현실을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에 가서 저도 많은 깨달음을 얻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제가 반성한 것이 있습니다. 첫날 세미나 장소에 도착해보니 대부분 다 처음 뵙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겉으로 흐르는 분위기가 목회자다운 진중함이 있는 분들이 있는 반면, 어째 영 안 어울리는 모습을 가진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분 중 매우 인상적인 분이 있었습니다. 대머리는 아니지만 듬성 듬성 나 있고 게다가 쇤 머리카락이 검지도 희지도 않고 노스름 해서 차라리 대머리가 보기 좋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키도 작고 얼굴 생김새도 표준에 한 참 못 미쳤습니다. 게다가 첫날 예배를 시작하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마이크, 기타 등을 만지작 거리고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목회자라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설령 목회자라 해도 목회자라 할 때 예상하는 어떤 이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뭐하나 기대할 만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자 이 분이 기타를 메고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분은 남섬의 한 교회를 담임으로 섬기고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만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화기애애한 한 몸과 한 마음으로 만들기 위해 섰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기타를 연주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혹은 게임으로 시간을 채워나갔습니다. 아 그런데 그 때 그분을 보면서 놀랬습니다. 겉모습으로 봐서는 전혀 기대할 것이 없고, 잘 할 것 같이 보이지 않았던 그 분은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서먹한 분위기를 한 방에 깨트리고,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배꼽을 빼 놓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 저를 비롯하여 목사님들 사모님들이 얼마나 눈물 나게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 후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면서 겉 모습과는 전혀 다른 깊은 내면과 달란트와 열정을 가진 분들을 보면서 제가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나와 다른 모습을 보면서 탐탁지 않게 여겨졌던 분들의 진면목을 보고 들을 때 저의 편견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 저렇게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볼 품 없는 모습이지만, 하나님은 이 분들을 부르셔서 각각의 달란트를 주시고 각각의 모습으로 내가 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 나가가시는 구나”
겉모습과 달리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고 각기 다른 사람들을 부르셨음을 이번에 깊이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어야 함을 더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 되어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길에서만 우리는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고 또 받음으로 비로소 온전한 몸이 되도록 부름 받은 한 몸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뜻에서 인사 함께 나누겠습니다.
“성도님은 저를 채워주세요, 저는 부족합니다.”
또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가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해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여신도님들의 봉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2박 3일 동안 그 캠프에 기숙하면서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꼬박 대접했습니다. 또 때마다 과일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를 해서 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보다 이분들이 정말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해서 환영하는 모습에 매끼마다 행복한 시간 이었습니다. 특히 호텔에서 일하는 한 셰프는 그 세미나를 위해 휴가를 내고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곤 땀 흘리며 요리를 준비했고 그 모습이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사람인데 목회자라고 이렇게 정성스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하고 대하는 모습에 다들 감동을 했습니다.
건성으로 억지로 한다면 그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서 그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누구에게 자신이 받아 들여진다는 것은 이렇게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생명의 빛이요, 생명의 물이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말에 감동했다가 이네 예수를 거부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두 가지 구약시대의 유명한 사건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그 두 가지 사건이 무엇입니까?
여자들 이름 중에 서양사람들은 이자벨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이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왕비가 있었는데 바로 이세벨입니다. 원어로 표현하자면 “이제벨”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역사적으로는 가장 악독한 왕비 중에 하나입니다. 음란하고 부패한 바알교를 들여온 두로 출신 이방여인 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바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그러면서도 최악의 길을 간 북이스라엘 아합 왕 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겼던지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17:33)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경고를 하게 하십니다. 이에 아합 왕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피신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요단 앞 그릿시내가에 숨어 지내게 합니다. 이때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날라다 주게 하여 살게 합니다.
그러나 시냇 물이 마르고 더 이상 지낼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세벨 왕비가 살았던 두로와 가까운 시돈이라는 지역의 사르밧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미망인을 예배하사 그를 통해 음식을 공급 받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아들 하나를 가지고 있었고, 엘리야가 그 여인을 만났을 때는 기막힌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진맥진하여 하나님께 지시 받은 대로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그러자 여인이 기막힌 말을 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 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 죽으리라”
통상 이런 딱한 사정이라면 차마 떡을 가져오라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여 큰 실례를 범했구나 하고 사과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남은 것이나마 맛있게 들라 이르며 자신은 다른 방도를 찾겠다고 해야 도리 일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런 도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17:11-14)
이에 이 여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놀랍게도 자신이 믿는 바알과 달리 여호와를 믿는 엘리야의 말을 듣고 여인이 순종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통속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약 9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예수님이 이 사건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엘리야를 보냈지만 이스라엘 왕과 이스라엘은 그를 버렸으나, 정작 이방 여인은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가뭄으로 다 굶어 죽어가는 때에 오직 그 여인만, 그것도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한 여인에게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나아만 장군에 대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그 뒤를 이어 엘리사가 선지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을 때 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늘 전쟁을 하며 괴롭혔던 시리아 지역의 아람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과는 아주 원수지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나아만 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장수 였으나 그에게 한 가지 핸디켑이 있었습니다. 장군이라는 체면에 안맞게 한센씨 병이라는 문둥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잡아 온 포로 중 한 소녀가 종이 되어 그의 집에서 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왕하5:3)
이에 나병으로 고생을 하던 나아만은 선물을 싸 들고 이스라엘에 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이 내려 온다는 말에 혼비백산하여 옷을 찢으며 고로워합니다. 이에 엘리사가 나아만이 내려 오면 자신에게 보내라고 이릅니다. 하여 나아만이 비로소 엘리사 앞에 섭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부하의 말을 듣고 결국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답급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아만의 병이 사라지고 그의 썩었던 피부는 어린아이 같이 회복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누구에게 이르렀는지를 상기하게 합니다. 누구에게 구원이 임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야의 말을 순종한 이방 사람 나아만 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 무엇을 깨우치고 있습니까? 하나님 사람들이 왔으나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요,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들이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이 자신을 거부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구원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임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흥분한 사람들은 분노하며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그 자리를 신적 권능으로 빠져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이 분노는 마침내 활화산 같이 폭발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의 유대교인들은 아직도 예수를 십자가에 잘 죽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를 통한 죄와 인생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사르밧 여인과 같고 나아만 같은 우리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가 죄를 용서 받았고, 인생의 고통 중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직 미 완성이지만 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놀라운 은혜가 삶 속에 살아 있고 체험 됩니다만 어떤 성도에게는 그 은혜가 멉니다. 왜 그럴까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 같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예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 주와 하나님으로 모셔지고 있습니까? 믿고 신뢰하여 성령을 따라 선택하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이번에 남섬 목회자 세미나가 끝나고 연합집회로 가진 수요예배 중 들은 말씀 중 가슴에 뜨겁게 살아 있는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 새생명교회를 섬기고 있는 강준민 목사를 통해 들려온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낭비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 거기에서 가서도 누명을 썼고, 옥에 갇히고, 술관원에게 2년이나 잊혀진 상태로 지내야 했던 13년의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낭비하지 않으셨음을 말했습니다. 차라리 없었으면 했을 아프고 괴로운 인생의 길,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동행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붙잡아 줬습니다. 그리곤 그를 통해 애굽을 살리고, 아버지를 비롯해 형제들과 가족을 살리는 길이 인생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픔이요 눈물이요 무의미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소망의 인내를 이루십시요. 하나님을 더욱 붙드십시요.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지 않고 끝까지 주를 부르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낭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마침내 정금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줄 것입니다.
지난 크라이스트처지에서 지진이 난 후에 겪었던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50명까지 자라던 교회가 지진이 나니 반토막이 나고, 거기에도 또 반토막이 되고 하면서 마침내 교인들이 다 떠나더랍니다.
그리곤 딱 한 가정이 남았답니다. 그래서 모든 힘을 잃은 나머지 그 목사님이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 한 가정 마저 빨리 떠나게 해주십시요. 그래야 한국에라도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괴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 할 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그 가정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너를 위로하라고 그 가정을 남겨 두었다”
그 말씀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금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처절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은 힘이 없어 포기하려 하나 하나님은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그 신실하심, 우리를 향한 사랑에 충성을 다하는 하나님이심을 본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을 믿고 그 한 가정을 위로 삼아 목회 현장을 지키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열 가정이 되돌아와 새 힘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 녀석이 자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방법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해보니 특별한 것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공부로 영광 돌리기로 했답니다. 그리곤 그 아버지가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러 가면 그 때 일어나 공부하기를 시작하더랍니다. 그리고 지난 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올해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고등학교 옆으로 지나면서 학교 담 길가에 세워진 멋진 간판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간판은 총천연색 칼라 사진이었고, 남학생과 여학생 각 한 명이, 정확히는 남학생이 보다 앞에 여학생이 약간 뒤에 서있는 형태의 사진 이었습니다. 그걸 보여주면서 저기 저 남학생이 아들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사진은 그 해 졸업생 중 수석 차석을 알려주는 사진이었고, 그 목사님의 아들은 그 해 덕스를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랑스럽게 웃고 있는 아들의 사진을 보면서 아프고 힘든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에 그가 얼마나 깊은 감사를 올렸을지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는 저도 속으로 눈물이 흘렀는데, 그 아버지는 오죽 감사의 눈물이 나고, 오죽 그 아들이 이뻣을까요?
하나님은 고난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손가락질 해도, 아니 눈에 보이게 실패하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고난을 절대로 허투로 만들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상을 바라보고 십자가 고난의 길을 참으시고 승리하신 주님처럼,
믿음의 인내를 이루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마음에 주를 모시고 따를 때,
우리 눈물과 고뇌를 통하여 우리를 정금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를 정금 같은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빛이요, 생명의 물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외면치 말고
마음에 주와 하나님으로 모시고 날마다 찾고 구하고 만나는 삶의 길을 가십시오. 거기에 고난을 낭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예비되어 있을 줄 믿습니다.
이 은혜를 덧입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
은혜로 사는 인생이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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